요한 볼프강 폰 괴테(독일어: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일~1832년 3월 22일)는 독일의 고전주의 성향 작가이자 철학자, 과학자이다.
바이마르 대공국에서 재상직을 지내기도 하였다. 생애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다. 왕실고문관인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학과 성경을 읽었다. 그는 북독일계 아버지에게서 '체격과 근면한 생활 태도', 남독일계 어머니에게서 예술 사랑과 '이야기 짓는 흥미'를 이어받았다. 어린 나이에 신년시를 써서 조부모에게 선물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67년에 첫 희곡 ‘연인의 변덕’을 썼다. 1770년 슈트라스부르크( 스트라스부르 ) 대학 재학 당시 호메로스, 오시안,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에 눈을 떴으며, ‘질풍노도 운동 (Sturm und Drang)’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법률 사무소 견습생일 때 약혼자 있는 샤를로테 부프와 사랑에 빠지는데, 이때 체험을 소설로 옮긴 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이다. 그는 1775년 바이마르로 이주했으며, 이 도시를 문화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 했다. 행정가로 국정에 참여해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고,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지질학, 색채론 등 인간을 설명하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786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했고, 1794년 실러를 만나 함께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1796년에 대표적인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썼다. 1805년 실러의 죽음으로 큰 충격에 빠지지만, 이후 창작 활동과 연구는 끊임이 없었고, [색채론](1810),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1821), [이탈리아 기행』(1829) 등 완성했다. 스물네 살 구상하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완성한 역작 [파우스트]를 마지막으로 1832년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천재교육을 받았으며, 7년 전쟁 중 그의 고향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 극과 회화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레트헨과의 사랑(1763년~1764년)이 깨어진 후 16세 때 입학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1765년~1768년), 안나카타리나 쇤코프와 연애를 하였고, 이 체험을 통해 로코코풍의 시나 희곡을 발표하였는데 목가조의 희극 <애인의 변덕>, <공범자>가 그것이다. 분방한 생활로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하여 요양 중(1768년~1770년), 수산네 폰 클레텐베르크(1723~1774)와의 교제를 통하여, 경건한 종교감정을 키웠으며, 또한 신비과학이나 연금술에 흥미를 기울였다. 회복 후, 177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법률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러던 중에 헤르더와 상봉해, 문학의 본질에 눈뜨고 성서, 민요,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에 친숙해졌다. 그의 영향으로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당시 지배적이었던 프랑스 고전주의 미학에의 반발이 심해졌다. 제센하임의 목사의 딸인 프리데리케 브리온을 사랑하여 민요풍의 청신소박한 서정시를 지었고, 대승원의 건물을 보고 고딕 건축의 진가를 터득하기도 하였다?. 귀향후 변호사를 개업(1771년)하였으나, 관심은 오히려 문학에 쏠려 《괴츠 폰 베를린힝겐》(1773년)의 초고를 정리하고 다름슈타트의 요한 메르크(1741~1791)와 친교를 맺었다. 1772년 법률실습을 위해 베츨라어 고등법원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샤를로테 부프(1753~1828)를 알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슈투름 운트 드랑기의 대표작인 희곡 《괴츠 폰 베를린힝겐》 및 비극 《클라비고》, 비극 《슈텔라》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여 작가적 지위를 확립했다.